부산 영도 · 골목에 숨겨진 70년의 메시지
"잘 보이 않는 것은 가장 소중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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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 관찰력
사진을 찍으면서 세상을 본다. 벽화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
동생 · 수학·지도 · 몬도감 마스터
숫자 패턴을 찾는 천재. 골목을 미로가 아니라 퍼즐로 본다. 크리처 수집 게임 '몬도감'의 마스터 컬렉터 — 387마리 몬(Mon)의 능력치와 진화 트리를 전부 외우고 있다.
아빠 · 사진작가
부산 골목 문화 취재 차 왔다. 카메라로 기록하는 남자.
마을 해설가
이 마을에서 태어난 70대. 피난민 부모님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수상한 사진가
벽화를 쫓는 정체불명의 인물. 무엇을 찾고 있는가?
7월 셋째 주 금요일 저녁. 서울.
현우가 저녁을 먹다가 말했다.
"이번 주말에 부산 가자."
"부산? 왜?" 지원이 젓가락을 멈췄다.
"감천문화마을 취재 하러. 아빠가 사진 잡지에 원고 내야 하거든."
"그彩色 마을? 벽화 있는 데?" 지후가 눈을 반짝였다.
"맞아. 근데 그냥 취재만 하려고 했는데, 아까 편집장님이 재밌는 얘기를 해 주셨어."
현우가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낡은 흑백 사진이었다. 1950년대로 추정되는 감천마을의 모습.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들.
"편집장님 할아버지가 전쟁 직후에 이 마을에 살셨대.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상한 유언을 남기셨대."
"무슨 유언?" 지원이 물었다.
"'마을 골목에 숨겨진 것을 찾아라.' 그게 전부래."
지원과 지후가 서로를 봤다.
"...가자." 지원이 말했다.
"KTX 예매해야지!" 지후가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다음 날 새벽, 가족은 부산행 KTX에 올랐다.
부산역에서 버스로 20분. 지후는 버스 좌석에서 습관처럼 몬도감 앱을 열어 386번 슬롯을 확인했다 — 빈 칸 하나. 전국을 돌며 385마리를 모았는데, 마지막 한 마리가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이번 부산에서는……" 중얼거리며 화면을 껐다. 옆자리의 지원은 이어폰을 끼고 폰으로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 알록달록한 의상에 화려한 세트. 버스 창밖으로 감천문화마을 입구가 보였다.
눈앞에 산비탈을 가득 채운 알록달록 집들이 펼쳐졌다. 파란 지붕, 노란 벽, 초록 창문. 마치 누군가 거대한 물감 상자를 산에다 쏟아부은 것 같았다.
"우와……" 지후가 입을 벌렸다.
"마추픽추 같아. 아니, 걸그룹 뮤직비디오 세트 같기도 하고." 지원이 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벽면의 색 조합에 눈이 반짝였다 — K-Pop 안무 배경으로도 완벽할 색감이었다.
"페루 마추픽추? 왜?"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집들이 올라가 있잖아. 남미의 잃어버린 도시처럼."
현우가 안내판 앞에 섰다.
"'감천문화마을. 2009년부터 예술 프로젝트로 마을 전체가 갤러리가 됨.' ……여기가 원래는 Korean 전쟁 때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야."
"피난민?"
"1950년. 전쟁이 터지면 집을 잃고 떠돌게 되지. 부산이 임시수도였으니까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왔어. 영도 산비탈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거야."
입구를 지나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세계가 바뀌었다.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갈라지고 합쳐졌다. 벽에는 알록달록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물고기, 꽃, 별, 사람들. 계단은 가파르고, 집 문들은 각기 다른 색이었다.
"길이 너무 복잡해." 지후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래서 미로라고 했잖아." 지원이 카메라를 들었다.
첫 번째 계단을 올라가는데, 지후가 멈췄다.
"잠깐. 누나, 이 계단 수가 몇 개야?"
지원이 뒤를 돌아봤다. 계단이 아래까지 쭉 이어져 있었다.
"모르겠어. 세어볼래?"
지후가 내려가서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꼽으며.
"1, 2, 3…… 14, 15, 16."
"16개."
지후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적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16…… 4 × 4."
"그래서?"
"완제곱이야. 4의 제곱."
지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클릭했다. 몬도감에서 몬의 진화 트리를 해독할 때와 같은 느낌 — 흩어진 조각들이 하나의 규칙으로 정렬되는 순간. 숫자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지원은 벽면의 벽화를 찍으며 작게 박자를 세고 있었다 — 습관처럼. 음악을 들으면서 걸을 때 자주 하던 동작이었는데, 지금은 이어폰이 없어도 골목의 리듬이 느껴졌다. 계단 간격, 색의 반복, 벽화가 나타나는 간격이 어딘가 박자 같았다.
현우가 뒤에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지후가 계단 수를 세고 있어요. 16개래요."
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안내판 사진을 확대했다.
"이거…… 편집장님이 보내주신 지도가 있었어."
현우가 스마트폰에서 낡은 마을 지도를 꺼냈다. 1950년대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손그림 지도. 거기에 빨간 펜으로 "16"이라고 적힌 곳이 있었다. 지금 서 있는 계단이었다.
"여기에 표시가 있어."
"뭔 뜻이야?" 지원이 물었다.
"몰라. 하지만 우연이 아닐 수도 있어."
완전제곱수: 1, 4, 9, 16, 25, 36…… 어떤 자연수를 두 번 곱해서 나오는 수입니다. 16 = 4×4. 건축에서 정사각형 공간을 설계할 때 자주 쓰입니다.
계단식 주택 (Terraced Housing): 경사지에 집을 층층이 올려짓는 방식. 부산 감천마을, 이탈리아 친퀘테레, 페루 마추픽추 모두 같은 원리입니다. 경사가 가파를수록 집들이 더 조밀하게 붙습니다.
골목을 더 올라갔다. 벽면 전체가 거대한 캔버스였다. 물고기 떼가 헤엄치는 벽화, 꽃이 피어나는 계단, 별이 쏟아지는 담벼락.
"진짜 예쁘다." 지원이 사진을 연신 찍었다.
"누나, 저기 봐. 물고기 벽화."
벽 전체에 파란 물고기들이 떼 지어 헤엄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산호, 해초, 거품. 색감이 아주 선명했다.
"물고기가 몇 마리야?" 지후가 물었다.
"몰라, 많아."
"세어보자."
지원이 사진을 찍고 확대했다. 지후가 화면을 보며 하나씩 짚었다.
"1, 2, 3…… 7, 8…… 그리고 여기 작은 거 3마리…… 총 11마리."
"11?"
지후가 수첩에 적었다. 그러다 다른 물고기 벽화도 발견했다. 조금 더 위쪽 골목 벽에도 물고기들이 그려져 있었다.
"저것도 세보자."
두 번째 물고기 벽화. 이번에는 주황색 물고기들이었다. 세어보니 7마리.
"그리고 세 번째."
세 번째 벽화는 작았다. 문 옆 담벼락에 그려진 초록 물고기. 3마리.
지후가 수첩을 정리했다.
지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숫자만 보면 이상해. 규칙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이게 암호야? 그냥 물고기 개수 아냐?"
현우가 다가왔다. 사진을 확대해서 보더니 표정이 변했다.
"지후야, 너 천재다."
"네?"
"이 물고기들. 자세히 봐봐. 첫 번째 벽화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다른 쪽을 보고 있어."
지원이 사진을 다시 확대했다. 파란 물고기 11마리 중, 한 마리만 반대 방향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그 물고기의 눈이 별 모양이었다.
"진짜야! 다른 물고기는 동그란 눈인데, 이건 별이야."
"두 번째 벽화도 봐."
두 번째 주황 물고기 7마리 중에서도 한 마리가 별 눈을 하고 있었다. 세 번째도 마찬가지. 3마리 중 1마리.
"벽화마다 별 눈 물고기가 한 마리씩."
지후가 수첩을 다시 정리했다.
지후가 수첩 한쪽 귀퉁이에 작게 덧붙였다 — 늘 하던 버릇이었다. 발견한 것을 몬도감 양식으로 분류하는 것.
등차수열: 연속하는 두 항의 차이가 일정한 수열. 11, 7, 3은 공차가 -4인 등차수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고 했습니다.
물고기와 부산: 영도는 원래 어촌이었습니다. 감천문화마을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했습니다. 벽화의 물고기는 이 마을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물고기 단서를 발견한 뒤, 가족은 더 높이 올라갔다. 골목이 갈라지는 교차점마다 색칠된 집 문들이 보였다.
지후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잠깐. 문 번호들 좀 봐."
골목 양쪽에 늘어선 집 문마다 번호표가 있었다. 지후가 주위를 둘러보며 읽었다.
"3번, 5번, 7번…… 9번, 11번…… 13번. 다 홀수야."
"짝수는?" 지원이 물었다.
지후가 골목을 쭉 걸으며 문 번호를 확인했다. 한쪽 벽에만 집이 있는 골목이었다. 문 번호는 3, 5, 7, 9, 11, 13. 전부 홀수였다. 짝수 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상하다. 보통 번호는 양쪽에 번갈아 가며 매기지?"
"맞아. 홀수는 왼쪽, 짝수는 오른쪽. 근데 여긴 한쪽 벽에만 문이 있어."
지원이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짝수 번호가 있어야 할 쪽은…… "
반대편 벽을 봤다. 거기는 집이 아니라 벽화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벽화 위에, 희미하지만 숫자가 적혀 있었다. 페인트가 거의 벗겨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지후, 벽화 위에 뭐라고 적혀 있어?"
지원이 플래시를 켜서 사진을 찍고 확대했다. 벗겨진 페인트 아래에서 숫자들이 드러났다.
2, 4, 6, 8, 10, 12
"짝수가 벽화 아래에 숨어 있어!" 지후가 소리쳤다.
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벽화를 칠하면서 원래 짝수 번호를 덮어버린 거야. 아니면…… 일부러 숨긴 건가."
지후가 수첩에 적었다.
지후가 수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16, 11, 7, 3…… 그리고 지금 6."
"이 수들을 다 더하면?" 지원이 물었다.
"16 + 11 + 7 + 3 + 6 = 43."
"43…… 의미가 있을까?"
현우가 지도를 다시 꺼냈다. 1950년대 지도 위에 빨간 점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아까는 '16'이라는 숫자만 봤는데, 다른 점들 옆에도 숫자가 적혀 있었다.
"여기 11, 여기 7, 여기 3…… 그리고 이 점 옆에는 아무것도 안 적혀 있어."
빨간 점 중 하나는 아무 숫자도 없었다. 현우가 현 위치를 비교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이야. 이 교차점."
"그럼 여기가 네 번째 단서가 있는 곳이네?" 지원이 말했다.
"그런 셈이지. 근데 단서가 뭘까?"
그때, 지후가 벽화 아래 벗겨진 페인트를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짝수 숫자들 사이에, 아주 작은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누나, 이거 봐."
2와 4 사이, 6과 8 사이, 10과 12 사이. 각각 작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화살표는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북쪽.
"전부 위쪽, 북쪽을 가리키고 있어."
지원이 나침반 앱을 켰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정확히 북쪽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 골목 끝에 보이는 것은 —
"저…… 저게 뭐야?"
북쪽 골목 끝, 높은 곳에 노란색 조형물이 서 있었다. 먼 거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와 장미, 그리고 여우.
"어린왕자!" 지후가 소리쳤다.
홀수와 짝수: 자연수를 2로 나누었을 때 나누어떨어지면 짝수, 나머지가 1이면 홀수입니다. 한국의 전통 건축에서 홀수는 '양(陽)'을 상징합니다. 불국사 다리의 아래 arch 개수도 홀수였죠.
방위와 나침반: 나침반은 지구 자기장을 이용해 방향을 가리킵니다. 북(N)·동(E)·남(S)·서(W) 4방위, 또는 360도로 세밀하게 표시합니다. 부산 영도는 북위 35°에 위치합니다.
골목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계단이 점점 가팔라졌다.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 위에, 그 조형물이 있었다.
어린왕자 동상이었다. 노란 머리카락, 파란 코트, 목에 매린 초록 스카프. 손에는 장미를 들고 있었고, 발치에는 붉은 여우가 앉아 있었다.
"진짜 어린왕자다." 지후가 눈을 반짝였다.
"감천문화마을 랜드마크야." 현우가 사진을 찍었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따온 거지."
"읽어봤어?" 지원이 물었다.
"당연하지. 여러 번."
"나도."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상 주위를 둘러봤다. 동상 받침대에 명판이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어린왕자."
지원이 명판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명판 아래, 작은 금속판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거기에 숫자와 방향이 적혀 있었다.
"43!" 지후가 소리쳤다. "내가 계산한 43이 여기 나와!"
"뭐가 43이라고?" 지원이 놀랐다.
지후가 수첩을 펼쳐 보여줬다. 계단 수 16, 물고기 11·7·3, 홀짝 차이 6. 이 숫자들을 모두 더하면 43.
"우와…… 이거 진짜 암호야." 지원이 수첩을 보며 감탄했다.
현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편집장님 할아버지가…… 70년 전에 이걸 만든 거야."
"어떻게? 이 동상은 최근에 만들었잖아?"
"동상은 최근이지. 하지만 단서는 1950년대부터 있었어. 계단 수, 벽화 위치, 문 번호…… 벽화가 칠해지기 전부터 짝수가 이미 거기 있었어."
"그럼 벽화를 칠한 사람도 암호를 알고 있었던 거야?" 지원이 물었다.
"아마. 2009년 예술 프로젝트를 할 때, 원래 숨겨져 있던 단서를 벽화 속에 다시 숨긴 거야. 원래 판잣집 벽에 적혀 있던 숫자들을 벽화 안으로 녹여버린 거지."
지후가 나침반을 확인했다. 북북동 방향으로 43보.
"가자." 지후가 앞장섰다.
나침반을 보며 북북동으로 걸었다. 골목을 따라 30보, 40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 43번째 보폭에서,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거기에 낡은 우물 하나가 있었다. 돌로 쌓은, 1950년대식 우물.
"우물이야." 지원이 사진을 찍었다.
우물 옆에 안내판이 있었다.
"'감천 공동우물. 1951년 축조. 마을 주민들이 함께 사용하던 유일한 식수원.' …… 1951년."
"전쟁 한가운데 지은 거네." 지후가 중얼거렸다.
현우가 우물 가장자리를 살폈다. 돌 틈 사이에 무언가가 보였다. 금속판이었다. 녹이 슬어 있었지만, 거기에 글씨가 파여 있었다.
지후의 손이 떨렸다.
"다섯 아이가…… 이걸 만든 거야?"
"피난민 아이들이." 현우가 목소리를 낮췄다.
바람이 불었다. 마을 아래에서 부산항의 배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린왕자 (Le Petit Prince): 1943년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쓴 동화. 어른이 되어가며 잃어버린 순수함을 이야기합니다. 감천마을의 어린왕자 동상은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상징합니다.
공동우물: 수도가 없던 시절, 마을 사람들이 함께 파고 함께 쓴 우물입니다. 한국 전쟁 중 부산에서는 우물 하나가 마을 전체의 생명줄이었습니다. 우물 주변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정보 교환의 장소였습니다.
우물 공터에서 쉬고 있는데, 계단 아래서 발소리가 들렸다. 흰 머리카락에 등산 스틱을 짚은 할머니가 올라오고 있었다. 마을 해설가 명찰을 달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니?" 할머니가 물었다. 목소리는 연량에 비해 맑았다.
"아, 저희가 우물에 적힌 글을 봤거든요." 현우가 금속판 사진을 보여줬다.
할머니가 사진을 보더니 눈이 커졌다.
"어머. 이걸 찾았구나."
"이걸 아세요?"
"알고말고. 난 이 마을에서 태어났어. 1953년."
할머니의 이름은 김순희. 73세. 부모님이 1951년 피난을 와서 정착했다. 태어날 때부터 이 우물 옆에서 자랐다.
"저 금속판은 내 어머니 친구들이 새긴 거야."
"친구들이요?" 지원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할머니가 우물 가장자리에 앉았다.
"1951년, 이 마을에 피난 온 아이들이 다섯 명 있었대. 내 어머니와 네 명의 친구들. 다섯 아이 모두 열두세 살이었고."
"다섯 아이……" 지후가 수첩을 꺼냈다.
"아이들은 학교도 못 갔어. 전쟁이니까. 대신 골목을 뛰어다니며 놀았지. 그런데 그 아이들 중 한 명이——내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 옥희라는 아이——가 수학을 참 좋아했대."
지원과 지후가 서로를 봤다.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
"옥희가 말했대.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는 암호를 만들자'고."
"헤어지면 어떻게 만나요?" 지후가 물었다.
"옥희가 말했대. 암호를 풀면, 이 마을에서 만난 걸 잊지 못할 거라고. 장소가 아니라 기억으로 만나는 거라고."
바람이 불었다. 할머니가 잠시 먼 산을 바라봤다.
"다섯 아이가 각자 암호의 한 부분을 만들었어. 내 어머니는 물고기를 그렸고——아버지가 어부였거든——옥희는 숫자를 담당했고, 다른 아이들은 문 번호와 방향, 그리고 계단 수를 정했어."
"그런데요?" 지원이 물었다. "다섯 아이가 다시 만났어요?"
할머니가 미소 지었다. 슬픈 미소였다.
"전쟁이 끝나고, 아이들은 흩어졌어. 서울로, 대구로, 미국으로. 내 어머니만 여기 남았지."
"그럼 아무도 암호를 안 풀었어요?"
"옥희가 돌아왔어. 40년 뒤에. 1991년에."
"암호를 풀었나요?"
"몰라. 옥희가 왔을 때, 금속판을 찾았는지 안 찾았는지. 다만……"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 편지 한 장이었다.
"옥희가 내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야.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한테 주셨어."
현우가 편지를 받아 읽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순희야,
나 여우야. 기억나?
마을은 예뻐졌어. 계단도, 벽도, 물고기도.
근데 우물을 못 찾겠어.
43보를 걸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43보야?
우리가 만든 암호의 끝에는, 우리가 함께였던 그 시간이 있어.
그걸 찾으면 돼.
— 옥희, 1991년 여름
지원의 눈이 촉촉해졌다.
"여우…… 옥희가 자기를 여우라고 불렀어요?"
"응. 『어린왕자』를 좋아했거든. 여우가 어린왕자한테 말하잖아. '너의 장미꽃을 길들인 것은 네가야.' 옥희가 늘 그 말을 되뇌었대."
한국전쟁과 부산: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전국에서 부산으로 피난민이 몰려들었습니다. 부산은 임시수도였고, 영도와 영도의 산비탈에는 수만 명의 피난민이 판잣집을 지으며 살았습니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끝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여우와 길들이기: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길들인다(tame)"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돼." 감천마을의 벽화 속 여우는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합니다.
할머니가 떠난 뒤, 가족은 편지를 다시 읽었다.
"43보를 걸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43보야?" 지원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어린왕자 동상에서부터 43보를 걸었잖아." 지후가 말했다.
"근데 옥희는 동상에서부터 안 걸었을 수도 있어. 동상은 나중에 만들어졌으니까."
"그럼 어디서부터?"
현우가 지도를 펼쳤다.
"옥희가 1991년에 왔을 때, 우물을 못 찾았대. 그건 우물 위치가 바뀌어서가 아니라, 시작점을 몰라서야."
"시작점이 뭔데?" 지후가 물었다.
"옥희가 마을에 들어온 입구. 원래 피난민들이 처음 들어왔던 길."
할머니가 말해준 게 있었다. 1951년에는 마을 입구가 지금과 달랐다. 지금은 도로가 나 있지만, 당시에는 영도 해안도로에서 산길을 타고 올라왔다. 그 산길 입구가——
"할머니가 말씀하셨잖아. '바다에서 보이는 계단'이라고." 지원이 떠올렸다.
"맞아. 피난민 배가 영도항에 닿으면, 산을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대. 그게 입구였어."
"지금 그 계단이 어디야?"
현우가 지도에서 '16'이라고 적힌 첫 번째 단서를 가리켰다.
"우리가 처음 세었던 16계단. 거기가 원래 입구야."
"그럼 16계단에서 북북동으로 43보를 걸으면?" 지후가 계산했다.
"우물이 아니라 다른 곳이 나올 수도 있어."
지원이 제안했다.
"옥상에 올라가서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자. 그러면 지도 위의 점들을 한 번에 볼 수 있어."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마을 중간쯤에 공개된 옥상 전망대가 있었다. 올라가니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 지붕들이 계단식으로 쌓여 있었다. 아래로는 부산항, 배들, 남항대교. 위로는 영도의 산등성이. 그리고 마을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우와……" 지후가 넋을 잃었다.
지원이 지도와 실제 마을을 비교했다. 1950년대 지도 위의 빨간 점 5개를 실제 위치에 대응시켰다.
"여기가 16계단. 여기가 물고기 벽화 3개. 여기가 홀수 문. 여기가 어린왕자. 그리고 여기가 우물."
지후가 지도 위의 점들을 손가락으로 이었다.
"누나, 이 점들을 선으로 이으면……"
다섯 점을 순서대로 이었다. 16계단에서 시작해서 물고기 벽화로, 홀수 문으로, 어린왕자 동상으로, 우물로. 그리고 선이 만드는 모양은——
"별!" 지후가 소리쳤다.
다섯 개의 점을 이은 선이 별 모양을 그렸다. 오각별. 마치 물고기의 별 눈처럼.
"다섯 아이, 다섯 점, 별 모양."
현우가 사진을 찍었다. 손이 떨렸다.
"이건 그냥 암호가 아니야. 이건…… 다섯 아이의 약속이야."
오각별 (Pentagram): 다섯 개의 점을 연결해 만드는 별 모양.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완벽한 조화"의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정오각형의 대각선을 모두 그리면 자동으로 오각별이 만들어집니다.
조감도 (Bird's-eye View):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 골목의 미로 구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감천마을은 구글 어스 위성 사진으로 봐도 알록달록 지붕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 골목을 걷고 있는데, 지원이 멈췄다.
"잠깐. 저 벽화."
지원이 가리킨 벽에는 벽화가 있어야 했다. 아까 지나갈 때 분명히 봤던 물고기 벽화. 파란 물고기 11마리 중 별 눈을 가진 한 마리.
그런데 지금, 벽화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누군가 페인트를 칠해 덮어버린 것 같았다. 흰 페인트가 덮인 부분은 물고기 4마리 정도. 별 눈 물고기도 그 안에 있었다.
"누가 지웠어?" 지후가 놀랐다.
"우리가 올라간 사이에?" 지원이 사진을 비교했다. 두 시간 전 사진에는 벽화가 온전히 있었다.
현우가 주위를 둘러봤다. 골목 저편,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모자에 큰 카메라 가방.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저 사람……" 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사람이 떨어뜨린 건지, 계단 위에 작은 종이 조각이 있었다. 지후가 주워서 폈다.
종이에는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별 눈을 찾아라. 5개의 벽화에 5개의 별.
하나를 지우면 4개. 4개를 지우면 1개.
마지막 별이 가리키는 곳에, 답이 있다.
"벽화를 지우고 있는 거야?" 지원이 소리를 높였다.
"그 사람이…… 그림자?" 지후가 종이를 쥐었다.
현우가 턱을 쓸었다. 생각이 복잡한 표정이었다.
"편집장님이 말씀하셨던 분이야. 사진가인데, 마을 벽화를 쫓고 있다고. 역사적인 벽화를 기록하려는 게 아니라…… 암호를 혼자 풀려고 하는 거야."
"왜?"
"편집장님도 정확히는 모르셔. 다만 그 사람이 편집장님 할아버지의 다른 손자——즉, 편집장님의 사촌——이라는 얘기가 있어."
"사촌? 그럼 암호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네." 지원이 말했다.
"알고 있으니까 벽화를 지우는 거야. 다른 사람이 풀기 전에, 자기가 먼저 답을 찾으려고."
"그건 너무해!" 지후가 화를 냈다. "다섯 아이의 약속인데!"
지원이 사진을 빠르게 검토했다. 다행히 아까 찍어둔 사진에 별 눈 물고기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림자가 벽화를 지워도, 사진 기록은 지울 수 없다.
"우리한테 사진이 있어." 지원이 카메라를 꽉 쥐었다. "이 사람이 벽화를 지워도, 우리는 기록하고 있으니까."
기록 보존 (Documentation): 유네스코(UNESCO)는 세계문화유산을 디지털로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아무리 튼튼한 건축물도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 기록은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벽화의 훼손: 벽화는 햇빛, 비, 습기에 의해 서서히 변색됩니다. 감천문화마을의 벽화는 매년 새로운 페인트로 다시 칠해집니다. 하지만 누군가 고의로 훼손하면? 사진만이 원본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서둘렀다. 그림자가 벽화를 하나씩 지우기 전에, 남은 별을 찾아야 했다.
지원이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을 확대했다. 마을 전체 조감도. 거기에 5개 단서 지점이 찍혀 있었다.
"별 눈 물고기는 3개 벽화에서 찾았어. 나머지 2개는 어디에 있을까?"
"5개 지점에 각각 별이 있다고 치면……" 지후가 지도를 봤다. "16계단, 물고기 벽화, 홀수 문, 어린왕자, 우물."
"물고기 벽화에서는 이미 찾았으니까 3개. 나머지 지점에서 2개를 더 찾아야 해."
가장 먼저, 16계단으로 돌아갔다. 입구 계단을 자세히 살폈다. 계단 옆 담벼락에 이끼가 끼어 있었다. 지원이 물로 이끼를 씻어냈다.
"여기!"
계단 옆 돌담에, 작은 별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돌에 정으로 파 드림. 70년의 풍상에 깎여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별이었다.
"네 번째 별!" 지후가 외쳤다.
마지막 하나. 어디에 있을까. 남은 지점은 홀수 문 골목과 어린왕자 동상, 그리고 우물.
"우물에는 금속판이 이미 있었어. 거기에도 별이 있을까?" 지후가 물었다.
우물로 돌아갔다. 금속판의 시(詩)를 다시 읽었다. "五人의 아이들, 七月에 모이고, 삼개의 그림이, 하나를 이룬다."
"기다려. 이 시에서……" 지원이 금속판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금속판 테두리에 작은 홈이 파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따라가니, 그 홈이 별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별 다섯 개. 테두리를 따라 고르게 배치된 다섯 개의 작은 별.
"여기! 금속판 테두리에 다섯 개의 별이 새겨져 있어!"
지후가 수첩에 정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 마리의 별 눈 물고기가 가리키는 방향을 합치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가리켜!" 지후가 소리쳤다.
"마루?"
"할머니가 말씀하셨잖아.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 거기에서 바다가 가장 잘 보인다고."
현우가 지도를 확인했다. 북서쪽, 마을 최고점. 거기에 작은 공터가 표시되어 있었다.
"거기가 답이야. 다섯 아이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
세 사람은 달렸다. 그림자보다 먼저.
방향벡터의 합성: 여러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벡터)를 더하면 하나의 결과 방향이 나옵니다. 서쪽 + 북쪽 + 북동쪽을 합성하면 대략 북서쪽이 됩니다. 물리학에서는 힘의 합성에 쓰이고, 내비게이션에서는 경로 계산에 쓰입니다.
방위각 (Bearing): 북쪽을 0°로 하고 시계 방향으로 잰 각도. 북서쪽은 약 315°입니다. 배와 비행기의 항법에서 사용합니다.
가파른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오후 다섯 시. 골목에 주황빛이 깔렸다.
마을 최고점, 마루.
작은 공터에 낡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무 의자. 페인트가 벗겨지고, 다리 하나는 철사로 묶여 있었다. 그리고 의자 옆에, 돌에 새겨진 글씨가 있었다.
커다란 돌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 이렇게 파여 있었다.
집은 장소가 아니다.
집은, 함께 울고 함께 웃던 시간이다.
이 마을 골목에서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었다.
옥희, 순이, 돌이, 명숙, 영호
1951년 여름 — 영도
다섯 이름. 다섯 아이.
지후가 수첩을 꽉 쥐었다. 지원은 아무 말 없이 사진을 찍었다. 현우가 돌 위에 손을 얹었다. 돌은 햇볕에 데워져 따뜻했다.
"70년이야." 현우가 중얼거렸다. "70년 전에, 열두 살 아이들이 이걸 새겼어."
"집은 장소가 아니라……" 지원이 글씨를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함께하는 시간." 지후가 대답했다.
그때, 계단 아래서 발소리가 들렸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는 사람. 검은 모자, 큰 카메라 가방. 그림자였다.
그는 공터에 도착하더니, 멈췄다. 돌 위의 글씨를 보고, 오래 서 있었다.
"……찾았구나." 그림자가 말했다. 목소리는 의외로 젊었다. 30대 중반쯤.
"당신이 왜 벽화를 지웠어?" 지원이 물었다. 냉담하게.
그가 모자를 벗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그는 잠시 돌 위의 이름들을 바라보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 흑백 사진이었다.
"할머니 사진이야. 옥희 할머니."
사진 속에는 다섯 아이가 마루에 나란히 서 있었다. 1951년 여름. 흑백이지만, 아이들의 웃음이 선명했다.
"나는 옥희 할머니의 손자야.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셨어. '마루에 가면 돌이 있어. 거기에 우리 메시지가 있어.' 근데 나는 암호를 못 풀었어. 그래서 벽화에서 단서를 지우면서, 남이 풀기 전에 혼자 찾으려고 했어."
"그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냐?" 지후가 말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맞아. 미안해. 할머니의 마지막 메시지를 혼자 차지하려 했어."
현우가 말했다.
"옥희가 편지에 썼잖아. '암호를 풀면, 이 마을에서 만난 걸 잊지 못할 거라고. 장소가 아니라 기억으로 만나는 거라고.' 암호는 혼자 푸는 게 아니야. 함께 푸는 거야."
그림자가 —아니, 옥희의 손자가 — 돌 위의 글씨를 다시 바라봤다.
"함께 울고 함께 웃던 시간……"
해가 바다 위로 내려앉았다. 마루에서 보이는 부산항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집이란 무엇인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함께한 기억이 있는 곳이 집입니다. 전쟁으로 집을 잃은 피난민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되었습니다.
공유의 가치: 암호는 혼자 풀면 답 하나를 얻습니다. 함께 풀면, 과정 자체가 기억이 됩니다. 옥희가 설계한 암호의 진짜 목적은 "함께 푸는 경험"이었습니다.
마루에서 내려오는 길. 해가 진 뒤의 골목에는 가로등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옥희의 손자 — 이름은 준영이었다 — 가 함께 걸었다.
"할머니가 남긴 편지에서, 마지막 문장이 있었어." 준영이 말했다.
"뭔데?" 지원이 물었다.
"'벽화가 지워져도, 돌이 깎여도, 우물이 메워져도. 우리가 함께였다는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 마을은 영원해.'"
지후가 걸음을 멈췄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후가 말했다. "숫자나 암호는 사라질 수 있어요. 근데 우리가 오늘 여기서 찾은 건, 숫자가 아니라 다섯 아이의 이야기잖아요."
지원이 사진을 확인했다. 오늘 하루 찍은 사진 300여 장. 골목, 벽화, 계단, 우물, 마루. 그리고 다섯 아이의 이름이 새겨진 돌.
"이 사진들을 편집장님께 보내드릴게." 현우가 말했다. "그리고 기사를 쓸 거야. 다섯 아이의 암호, 70년 만에 풀린 이야기."
"벽화를 다시 그릴 수 있을까요?" 지원이 준영에게 물었다.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위원회에 연락할게. 내가 지운 벽화를 내가 다시 그릴 거야. 이번에는 더 자세하게. 별 눈 물고기도, 원래 있던 숫자들도 다 드러나게."
"저도 도울래요." 지원이 말했다. "사진 기록이 있으니까, 원래 벽화가 어땠는지 다 알아요."
지후가 마을 입구 게시판을 가리켰다. 거기에 마을 지도가 붙어 있었다.
"이 지도에 별 모양을 그려두면 어때요? 다섯 단서 지점을 선으로 이은 별. 다른 사람들도 이 마을의 이야기를 알 수 있게."
현우가 미소 지었다.
"좋은 생각이야."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부산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지원이 마지막으로 마을을 돌아봤다. 알록달록 지붕들이 어둠 속에서 가로등 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에 또 오자." 지원이 말했다.
"응. 그때는 엄마도 데리고." 지후가 말했다.
"그래. 가족이 다 같이."
현우가 아이들의 머리를 쓸었다. 부산항에서 배 고동이 울렸다. 저녁 바다 냄새가 났다.
기억의 보존: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살아남습니다. 다섯 아이의 암호는 70년 동안 아무도 풀지 못했지만,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오늘 발견되었습니다. 우리가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쓰고, 지도를 그리는 것 — 그 모든 것이 기억을 보존하는 행위입니다.
감천문화마을의 현재: 2009년 예술 프로젝트 이후, 마을 주민들이 직접 벽화를 그리고 가게를 운영하는 "주민 참여형 문화마을"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관광객의 수익이 마을 주민에게 돌아가는 구조입니다.
그날 저녁. 부산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지원이 아이패드에 오늘의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후는 수첩을 펼쳐 단서들을 다시 정리하다가, 습관처럼 몬도감 앱을 열었다. 그리고 눈이 커졌다. 386번 슬롯이 반짝이며 채워져 있었다.
No.386 '색몽' — 타입: 빛/예술. 발견 장소: 감천문화마을. 알록달록 골목의 색이 모여 하나의 생명이 된 몬. 특성: 숨겨진 패턴을 드러낸다.
"……드디어 잡았다." 지후가 작게 웃었다. 386마리 완성. 남은 건 387번 딱 한 칸.
"지후야." 지원이 사진을 보여줬다. "이거."
마루의 돌 사진이었다. 다섯 아이의 이름. 그리고 그 아래에, 지원이 디지털로 그린 그림을 합성해 놓았다. 오각별 다섯 개가 서로 연결된 그림.
"우리가 만든 별." 지원이 말했다.
"다섯 아이가 70년 전에 만든 별이야."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알아?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어린왕자한테 말하는 장면이 있어."
"뭐라고요?"
"'네가 별들을 길들인 것은, 내가 그중 하나에서 웃고 있을 거라는 때문이야.' 옥희가 좋아했던 장면."
기차가 달렸다. 창밖으로 밤하늘의 별들이 보였다.
"다섯 아이가 하늘의 별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지후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럼 그 별들도 서로 연결되어 있을 거야." 지원이 아이패드를 닫았다. "오각별로."
현우가 미소 지었다.
"집에 가자."
기차는 어둠 속을 달렸다. 서울을 향해. 집을 향해.
그리고 감천문화마을의 골목에서는, 누군가가 내일 아침, 별 모양의 지도를 게시판에 붙일 예정이었다. 다섯 아이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생기도록.
★ 끝 ★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위치한 계단식 마을. 1950년대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산비탈에 정착하며 만든 마을이 2009년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알록달록 벽화 마을로 변신했습니다. "한국의 마추픽추"라고도 불립니다.
주소: 부산광역시 영도구 감천문화마을길
교통: 부산역에서 버스 6, 66, 88(A) 탑승. 감천문화마을 정류장 하차
관람시간: 상설 (야간 가로등 켜진 골목도 운치 있음)
입장료: 무료 (단, 후원금 2,000원 권장 — 마을 주민을 위한 기금)
• 어린왕자 동상: 마을 랜드마크. 장미와 여우와 함께
• 벽화 골목: 물고기, 꽃, 별, 새 등 알록달록 벽화 30여 점
• 전망대: 마을 중간 옥상에서 부산항 조망
• 우물: 1951년 축조된 공동우물 (마을 역사의 핵심)
• 어린왕자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1943)
• 부산 근현대사 — 부산박물관 간행물
• 감천문화마을 공식 웹사이트: gamcheon.or.kr